라이벌 관계가 낳은 역작
안녕하세요. '유럽의 대표적인 라이벌을 뽑아봐라'라고 하면 아마 많은 분들이 프랑스와 영국이라고 답하실 겁니다. 이 두나라는 한국과 일본처럼 긴 시간 라이벌이었습니다. 이 경쟁 관계로 인해 탄생한 술이 바로 '발리 와인(Barley Wine)'입니다. 맥주인데 왜 이름에 와인이 들어가는지 궁금하신가요? 이 글에서 발리 와인에 대해서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발리 와인(Barley Wine)' 개념과 역사
'발리 와인(Barley Wine)'은 문자 그대로 '보리로 만든 와인'입니다. 그렇다면 발리 와인은 보리와 포도를 섞은 맥주일까요? 아닙니다. 발리 와인에는 와인의 주 재료인 포도가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또한 와인용 효모도 일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발리 와인은 이름만 와인이고 와인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발리 와인의 재료나 양조 방법은 모두 맥주의 것을 따릅니다.
발리 와인은 영국이 원산지인 에일 맥주이며 프랑스 와인에 대적하기 위해 만든 맥주입니다. 이 맥주는 17세기 ~ 18세기 유럽 제국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유럽 열강들은 식민지 확장을 위해 경쟁하고 심지어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식민지 경쟁을 일삼던 영국과 프랑스는 당연히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상류층 귀족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와인 불매 운동이 벌어집니다. 영국 귀족들은 '프랑스산 와인을 먹지 말고 우리가 프랑스 와인과 대적할 술을 만들자!'라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술이 '와인'이라면 영국을 대표하는 술은 '에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취지로 에일 맥주를 기반으로 하는 보리 와인, 즉 '발리 와인'이 개발됩니다. 한마디로 영국 귀족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만든 맥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발리 와인 맛의 특징
발리 와인은 프랑스 와인 경쟁자를 자처했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10% 정도로 높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높으려면 효모가 많은 맥아당을 발효해야 합니다. 따라서 맥아 역시 많이 투입되었습니다. 그 결과 발리 와인은 달콤하고 끈적한 맥아의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맥주입니다. 그 외 홉이나 효모의 맛은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끈적하고 달콤하기 때문에 음용하기 쉬운 맥주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맥아의 묵직한 단맛이 극대화된 맥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발리 와인은 대중적인 맥주는 아닙니다. 풍성한 맛을 위해 원재료를 많이 넣었기 때문에 가격이 고급 와인 수준으로 비쌉니다. 또한 숙성 기간도 3년 ~ 4년 정도 필요하여 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시장 논리에 따라 상시 판매는 어렵고 주로 한정판 맥주로 판매됩니다. 대형 마트에서 페일 라거 구매 하듯이 구매하는 맥주가 아니라 양조장이나 전문 취급점에 가서 구매해야 합니다.
발리 와인은 특유의 높은 알코올 도수와 깊은 맥아 맛으로 겨울철 인기가 많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비어'로 사랑받는 맥주이기에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서 출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참고로 '크리스마스 비어'란 크리스마스 및 연말연시 모임을 위해 출시되는 한정판 맥주를 말합니다. 크리스마스 비어로 정해진 맥주는 따로 없고 각 국가마다 특성이 다릅니다. 다만 공통적으로 겨울에 마시는 맥주이기 때문에 가볍고 청량한 맥주보다는 알코올 도수도 높고 묵직한 맥주가 주류를 이룹니다.
미국식 발리 와인
새롭고 도전적인 맥주를 좋아하는 미국 수제 맥주 양조장들은 발리 와인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미국식 발리 와인'이란 용어가 생길 정도로 저변이 확대되었습니다. 미국식 발리 와인과 영국식 발리 와인의 차이는 '홉의 영향력'입니다. 미국식 발리 와인은 홉의 풍미가 영국식 발리 와인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납니다. 앞서 설명했듯 영국식 발리 와인은 묵직한 맥아의 단맛에 집중한 맥주입니다. 홉의 존재감은 맥아에 가려져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미국식 발리 와인은 묵직한 맥아의 맛과 함께 홉의 씁쓸함도 매우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영국식 발리 와인보다 더욱 풍성한 맛을 자랑합니다. 이는 영국식 IPA와 미국식 IPA가 보이는 차이와도 유사합니다. 미국식 IPA는 원조인 영국식 IPA보다 훨씬 더 홉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맥주입니다. 임페리얼 스타우트, IPA, IPL 그리고 발리 와인까지. 미국 수제 맥주 양조가들의 홉 사랑은 정말 대단합니다.